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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윤 칼럼] 생각정치의 탄생에 즈음하여!
기사입력: 2020/10/0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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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정윤 박사    

 

 

`울진 왕피천`이 흐르는 행곡 주천대의 강 언덕 초가집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친은 농촌마을 아이들을 한학을 가르치는 훈장이었다.

 

모친은 가난한 농촌생활에서 나의 학비 때문에 읍내 5일장 마다 장바구니에 채소, 호박, 가지 등을 담아 시장 바닥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팔았다.

 

저녁노을이 장바구니에 담길 무렵 접힌 허리를 펴고 몇 푼의 돈을 쥐고 일어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삼 십리 바릿재 칼 돌산 고갯길을 고무신 찢어진다고 손에 들고 넘었다.

 

어느 추운겨울 날 갑자기 중병에 걸린 모친은 병원 한 번 못가고 어린 나를 두고 눈을 감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 다음해 노년에 외로운 부친마저 돌아가자 나는 학교를 자취하면서 마음속으로 고등학교만 졸업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삼 십리 통학 길에 농고를 다니던 나는 아침마다 농촌 부엌 큰 가마솥에 보리쌀과 반찬을 함께 넣고 생 솔잎을 피우면, 검은 연기에 눈물 반 땀 반이었으며, 설익은 보리밥을 먹고 학교를 가면 언제나 지각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 들려 광어 한 마리 사서 책가방에 넣고 집에 돌아오면 온통 가방 속의 책은 생선 물로 젖어 비린 냄새를 풍겼다.

 

대학 진학시험은 학비가 적게 드는 국립대학을 택했으나 수학과목인 미적분과 정적분을 농고에서 배우지 못해 독학하여 시험을 쳤으나 실패를 했다.

 

진학을 포기하고 육군에 입대하여 만기 제대를 한 후, 공무원 행정직 시험을 쳐서 말단 면서기를 했다.

 

낮에는 농가마다 다니며 객토하라, 피 뽑아라, 추경하라, 매상하라, 농약 처라 독려하면서 국도 중심의 도로행정을 했다.

 

퇴근 후에는 물 젖은 솜처럼 피곤한 몸을 하숙집에서 밤잠을 자지 않고 행정고시(5)공채를 2번이나 응시했으나 영어 때문에 결국 포기를 했다.

 

말단 면서기 생활도 친형이 야당 국회의원 출마했다는 이유 때문에 공화당의 황소 뿔은 나의 승진은 고사하고, 6개월 마다 이면, 저면으로 옮겨 다니게 했다. 선거 때만 되면, 전 직원이 담당 부락에 선거동향 파악한다며 출장가면서 나만 사무실에 남겨 두었다.

 

홀로 남은 나는 사무실 앞 대포집의 삐꺽거리는 나무의자에 앉아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통 김치 한 입 가득 씹으면, 목 줄기에서 솟아 나오는 향수냄새가 최고였다.

 

훗날 나는 서울에서 그때 그 시절 동료직원을 만났는데, 그는 선거 때만 되면 한 달 봉급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 출장가면서, 나한테는 절대로 비밀로 하라는 지시에 양심상 나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고 했다.”

 

서정쇄신의 영향으로 나는 군청에 시험을 쳐서 근무하다가 다시 총무처 시험을 쳐서 헌법기관의 중앙부서에서 근무를 했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과 대학원, 정치학 박사학위는 물론 미국대학교 정책연수까지 나에게 필요한 돈은 절대로 아끼지 않고 투자를 했다.”

 

5공화국이 시작되자 정치적인 야당 집안의 영향을 나는 받기 시작했다.

 

Y대학교 백양로 길에 모인 대학생들의 데모대는 정문을 향해 밀물처럼 쏟아져 나오자 방어막을 친 경찰특공대들과 학생들 간의 밀고 당기는 가운데 채류 탄 가스에 못 견딘 나는 교실로 도망치면서 뒤따른 추격대에 피해 화장실로 숨어 따가운 눈을 물로 씻어 냈다.

 

다른 날은 종로 5가에 개별적으로 대학생들이 집결하여 일반 시민들과 함께 동대문 방향으로 구름처럼 밀려가면, 사복경찰들은 데모대와 뒤섞여 행진하다가 한계점에 가면 일시에 독수리가 병아리 채가듯 일반인이고 대학생들 할 것 없이 잡아 낚아채어 닭장차에 가두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무리 속에서 나는 잡히지 않으려고 정신없이 도망치면서, 눈에 보이는 다방 안으로 무조건 뛰어 들어갔다.

 

다방 여주인은 내가 들어서자마자 문을 잠그고 전기 불을 끄면서 다방 안 사방에 촛불을 켰다.

 

촛불은 가스를 없앤다고 웃으며 말하는 여인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으나, 다방 밖에서 군화발소리가 요란하게 끊임없이 들리자 나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했다.

 

어느 날 남산에 있는 유명 식당에서 외국에 망명처럼 갔다가 돌아온 거물급 정치인 J씨에게 시국강연을 초청했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유명 대학원생들이 자신을 알아준다는 생각에 쾌히 승낙하여 과거 일본과 한국 간의 외교에 대한 강의를 했다.

 

그는 정치권력 최고의 정점에서 밥상까지 차려 놓아도 기회를 놓친 정치인이다.”

 

자신에게 새로운 정치권력을 잡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지 아주 열광적으로 강의하는 장소에는 대학원 학생들과 내가 초청하지 않은 정체불명의 사람들과 물 반고기 반씩이었다.

 

이튿날 그는 대전으로 정치적인 야망에서 내려갔으나 대학생들로부터 계란세례를

 

받으며 잔재는 물러가라소리치자, 그는 본당이라고 한 말이 신문에 기사화됐다.

 

갑자기 뜻하지 않은 사건이 나에게 일어났다.

 

독신으로 청춘을 받쳐왔던 형님이 이념정당 창당을 헌법 기관에 신고서를 제출하여 창당설립확인서를 받기위해 헌법기관의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 알 수 없는 기관요원 두 사람이 설립확인서를 받기위해 온 형님의 허리띠를 움켜잡고 4층에서 1층 계단까지 개 끌듯이 끌고 내려갔다.

 

이런 관경을 본 나는 미친 듯이 고함치며 때려죽인다며 웃옷을 벗고 덤벼들었다.

 

모든 직원들이 이런 광경을 바라보자 당황한 그들은 형을 두고 도망치듯이 갔다.

 

그 이튿날 전 직원들을 식당에 모아놓고 최고 높은 상관이 나 들으라는 식으로 한 번만 용서해준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남영동에서 초대가 왔다. 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직접 찾아온다고 협박을 해서 옆에 직원보고 오지 않으면 집으로 연락하라고 했다.

 

창문이 없는 검은 벽돌로 된 건물로 건장한 두 사람의 접대 하에 들어갔다.

 

나 보다 먼저 야권의 유명한 정치인 K씨가 들어 와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나와서 알았다.”

 

창문도 없는 검은 실내에서 기술자로 유명한 W반장이 대학원 수첩을 흔들며 나를 학생들 주모자로 몰고 있었다. 부하들 두 사람은 교대로 반복적으로 같은 말을 물었으나 몇 백번 물어도 대답은 아니라고 했다.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르자 창문이 없는 검은 벽돌집 밖에는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여기서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직위가 높아 보이는 사람이 들어오면서 빨리 나가라고 했다.

 

나가라는 소리에 정신없이 밖으로 나오는데 기술자인 반장이 너는 공직에서 승진할 생각을 말라는 말꼬리가 내 뒤를 급하게 따라 나왔다.

 

황급히 살고 있는 부천행 전철을 타고 가는 줄 알았는데 전철은 수원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후 언제나 집골목이나 나의 뒤에는 검은 그림자가 따라다닌다는 착각에 사로 잡혀 살았다.

 

바로 그날 나의 뒤에 들어온 대학생 P씨가 갑자기하고 죽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그의 죽음은 민주화의 불쏘시게 되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어느 날 미국 정보기관인 듯이 생각되는 요원이 사무실로 찾아와서 나에게 미국 대학교 리플릿을 보이며 유학을 가라고 설명하면서 권했다.

 

너무나 꿈에 그리던 유학의 기회가 현실로 닥쳐왔으나 가슴 속에는 늦게 결혼한 탓에 아직도 방바닥에 아들과 딸이 기어 다니고 있는 모습 떠올라 거절하고 말았다.

 

그해 국가직 5급 승진 시험이 있어 몇 년을 준비하여 자신 있게 응시한 시험이 안 되었다고 하자 너무 놀라 확인 전화를 담당 관리기관에 했으나 담당자는 1차 시험 한 과목에서 한 문제가 부족하여 과락이라고 했다.

 

담당자가 불러준 점수가 5점 단위로 짝 수가 맡지 않아 바로 시험 관리기관에 달려가서 불러준 점수가 짝 수가 맞지 않으니 시험답안 채점한 것을 보자고 요구했다.

 

답안채점 점수 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몇 시간을 소리치며 소란을 피우자 절취선이 된 채점 점수 지는 보여주지 않고 절취된 문제지만 보여주었다.

 

보여준 문제지 위에는 아무렇게 갈긴 점수가 문제지 복판에 아무렇게 갈겨써져 있고 절취된 채점한 점수지 부분은 보여주지 않았다.

 

점수지가 없는 문제지만으로는 나의 채점한 점수는 알 수 없다고 소란을 피우자 책임자 같은 사람이 나서며 현직에 유지하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소리에 나는 아무소리도 못하고 사무실에서 나서며 하늘을 한 번 처다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시험에 떨어졌다고 중앙에서는 관례도 없었던 인사로 지역으로 최초 발령 냈다.

 

유명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성분에 따라 사법시험도 붙지 못하는 시대라는 생각을 하면서나 자신을 스스로 위로 했다.

 

그 후 몇 번의 승진시험을 쳤으나 계속 같은 과목에 한 문제만 부족하다며 떨어지자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직장에 다닌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험에 떨어진 나는 부패한 정권에 대한 반항심이 생기자, 중앙에 근무할 적에 맡은 업무인 정치와 돈에 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전문서적을 출판하기로 결심했다.

 

5공화국의 검은 정치의 돈의 실체를 밝힌다는 내용이 알려지자 원고를 회수할러고 중앙에서 수단방법을 다해도 빼앗기지 않고 광화문 S호텔 특실에서 최초로 정당의 정치자금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기념회 장소에는 많은 학생들과 야당 정치인들이 참석하여 모두들 용감한 나의 행동에 감탄과 격려를 했다.

 

5공화국 시대는 이 분야에서 교수들조차 권력에 두려워 책은 고사하고 신문에 글 한줄 못내는 시대이었다.”

 

이름 있는 출판사가 전국적으로 책을 깔았으나 바로 판금조치가 되어 회수를 했다.

 

6공화국이 들어서자마자 바로 회수한 책을 전국적으로 다시 깔아 출판사의 손해를 적게 만들었다.

 

5공화국 시대부터 친한 정치인 L씨는 (벼랑 끝에 선 저자)나보고 공무원으로 희망이 없으니 같이 정치를 하자고 몇 번이고 권했다.

 

6공화국이 시작되자 이젠 희망이 있다는 판단에서 나는 여의도 다방에서 L씨를 만나 그의 권유에 따라 같이 정치를 함께 하기로 단단히 약속을 했다.

 

밤늦게 집의 현관에 들어서는 나에게 아내는 시험에 합격을 했다는 통지를 받았다며 기쁜 얼굴로 말했다.

 

정치를 하겠다며 굳은 약속을 한 나의 마음은 순식간에 봄눈 녹듯이 사라졌다.

 

늦게 승진한 나는 지역에 근무하면서 형의 비서 역할을 하며 정치적으로는 대화의 상대로서 정치의 동반자가 되었다.

 

이때는 형은 이념 정당의 간사장을 할 때에 서독에서 돌아온 D정치인이 새로운 정당을 창당할 적에 이념정당을 해산하고 합류를 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에 거물 야당 D정치인의 집 밖에서 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며 모닥불을 피워 놓고 시간이 되면 들어가서 만났다.

 

영남에 대한 정치적 동진정책에 형에 대한 역할에 기대를 걸고 있는 D정치인은 영남의 중책을 맡겼다.

 

나의 형님은 어둠은 가고 빛은 동쪽에서부터 밝아 온다고 믿었으며, 님이 가시는 가시밭길에 반야의 반딧불이 되겠다고 했었다.”

 

경북 고향에서 형은 국회의원 출마를 6번이나 출마하면서 D정치인의 동진정책의 기틀을 마련했다.

 

한국의 최고의 정치지도자로서의 위치에 오른 D정치인은 형님을 토사구팽 하고, 일본에서 돌아온 전혀 정체성이 다른 K씨에게 무슨 약점이 잡혔는지 선거 때에 공천을 주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형은 바로 죽음을 택했다.

 

많은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에 대하여 자살이니, 타살이니, 굶어 죽었다는 풍문이 돌았다.”

 

한 많은 정치 일생을 살아온 형님은 한 줌의 백색 가루가 되어 행곡 주천대의 오미산 천년 바위에 뿌려졌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터 위로 흘러가던 구름이 멈춰, 배신에 대한 분노의 슬픈 눈물을 뿌린다.

 

그 후 나는 실패한 정치가로 한 많은 정치일생을 마친 형님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고향에 단체장으로 출마했다.

 

공천권을 가진 정치인 K씨가 수억 원의 돈을 받고 공천했다는 의혹에 자신조차 국회의원에 공천을 받지 못하고 정치를 마감했다.

 

무속으로 낙선한 나는 새벽길에 승용차로 아내와 같이 서울로 가기 위해 나섰는데 나이 많은 백발의 장인은 굽은 허리에 지팡이를 잡고 서서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들어 주던 모습이 많은 세월이 흘려가도 나의 가슴 속에는 잊혀 지지 않는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국립 대학교 석좌교수로서 정치학을 강의를 했다. 정치학 박사로서의 이론과 실제를 겸한 나의 열광적인 강의는 많은 학생들이 수강을 했다.

 

그 많은 학생들 중에서 구석진 좌리에서 취업을 공부를 하는 학생을 보자 나는 옛날 나의 모습을 보았다. 일주일에 영어와 수학이 한 시간밖에 없자 농업시간에 영어와 수학공부를 했던 나의 모습을 생각했다.

 

지금은 모든 현직에서 물러난 나는 청파동 사무실에서 10년 넘게 봉사와 시민활동을 하며, 전문서적을 출판을 하고 있다.

 

이제 생각정치의 탄생 그룹의 회원이 100명을 넘게 되어, 그룹의 관리자로서 무한한 영광이며 무척 감사하다는 인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마음속에 담아둔 생각정치의 탄생에 대한 글을 열심히 게재함으로써, 정치인이 국민이 생각하는, 국민을 생각하는 정치를 함으로써, 국민이 행복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폴리틱스 미디어 대표 전) 국립 충주대학교 석좌교수(정치학),

-국회 법사위 정책자문위원  정치학박사 장 정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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