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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독립운동의 역사와 뿌리가 살아 숨 쉬는 '봉화 해저리 마을'을 찾아
- 14명의 독립 유공자를 배출, 그 중심에 심산 김창숙 선생이 있다
기사입력: 2021/03/04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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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바래미 마을의 만회고택>

 

우리나라 유림의 전통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는 역사와 문화와 전통의 고장 봉화는 한글 마을 이름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자 살아있는 민속촌 같은 느낌이 드러나는 매력을 느낀다. 매봉산 남쪽 줄기에 자리잡은 의성김씨의 집성촌 해저리 마을이 있다. 

 

봉화여행에서 있어 빠질 수 없는 독립운동가의 혼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바래미 마을이라는 곳이다. 바래미 마을의 해저[海低]는 [河上]물보다 낮은 바다였다.는 뜻으로 바다 밑이라고 해서 바래미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파라미[波羅眉]라고도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 해저마을은 영남의 대표적인 동성촌으로 의성김씨 가문에서 정조(재위 1776~1800)대에 많은 문과 급제자들을 배출하였고, 이 당시 영남 사람들의 정치·사회적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영남의 대표적인 명문으로 자리잡았다. 해저리는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에 속해 있다. 봉화군 봉화읍의 서쪽, 봉화에서 영주 방면으로 2차선 도로의 봉화쪽 입구에 위치한다.

 

이 해저리라는 마을 독립운동가의 본향이기도 하다. 이 바래미 마을은 14명의 독립 유공자를 배출했는데 독립운동 그 중심에는 심산 김창숙 선생이 있다. 또, 바래미 마을은 봉화읍 소재지에서 영주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해저리에 의성 김씨 집성촌이 이루어진 곳이다.

 

의성 김씨 문중이 1700년대 마을에 입향 후 200년동안 대과 16장과 진사 19분, 생원 44분의 소과 63장이 나왔다. 가히 그 학문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의성김씨의 충의는 일제시대에 까지 이어져 독립유공 수훈자 14분이 나왔으니 이는 바래미 마을의 정신이 아닐 수 없다.

 

바래미 마을은 원래 의령여씨들이 일부 살고 있었는데 조선 숙종때 관찰사를 지낸 의성 김씨인 팔오헌 김성구 선생이 이 마을로 와서 우물을 만들고 농토를 새로이 개척하면서 정착한 이후 마을도 번창하고 의성 김씨들이 많이 모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중앙에는 학록서당과 큰 샘이 있고, 아랫마을에는 학이 날라와 앉았다고 하는 학정봉과 감태봉 아래 독립운동가 남호 김뢰식 선생이 살던 남호구택과 영규헌, 김씨 종택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윗마을에는 3·1 운동 직후 독립청원서를 작성했던 유서깊은 만회고택과 명월루 등이 있어, 마을 전체가 입구 자(ㅁ자)형 전통와가로 이루어진 의성 김씨 집성촌이다.

  

지금도 의성김씨와 타 성씨를 합해 90여 가구가 살고 있지만 조선 말기 전성기에는 의성김씨들만 100여호가 넘게 살았다 한다. 거기다 과거에 급제를 하거나 벼슬에 오른 선비들이 많아서 영남일대 유림들과의 교류가 아주 활발했다고 한다.

 

바래미 마을에는 여러 유서 깊은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다. 문화재자료 제18호인 남호구택은 1876년에 건립되어 남호 김뢰식 선생이 살던 곳으로, 경상도의 아주 명망 높은 부호였던 남호 선생이 상해임시정부에서 군자금을 모금할 때 전 재산을 저당 잡히고 대부받은 돈을 내놓아서 그 공으로 지난 1977년에 건국공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중요민속자료 제 169호인 만회고택은 조선 말기에 승정원 부승지를 지낸 만회 김건수 선생이 살았던 곳으로, 그 전 6대조부터 살아서 300년이 넘은 집이다.

 

지난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 직후 유림들이 심산 김창숙 선생을 중심으로 이곳에 모여서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2차)를 작성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는 유서깊은 곳으로 1925년에 유림단 독립운동 자금 모금시에는 영남북부지방 유림들이 모여서 의논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또, 기념물 제 117호인 김건영 가옥은 구한말 독립운동가였던 해관 건영 선생이 지은 집으로 1919년 파리장서운동을 전개할 때 이곳 사랑채가 지역 유림들의 연명장소로 이용되었던 아주 뜻깊은 곳이다. 김규영 선생의 문과홍패와 김건영 선생의 소수의 망첩 등의 전적이 보관되어 있다.

 

그 밖에도 단사 김경온 선생이 영조원년에 진사를 하고난 뒤 지어서 은거를 하며 만권의 책을 읽었다는 단사정이나, 남호 선생이 세워서 국명저와 중국고대, 당송대의 중국본 서적이 보관되어 있는 영규헌, 병자각, 수오당, 개암종택, 팔오헌 종택, 해와고택 등 선조들의 살아가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보일 정도로 많은 유적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 봉화 이문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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