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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모두는 마음에서 일어난다
기사입력: 2022/10/05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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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대사는 신라시대의 고승이다. 성은 설(薛)씨이며 법명이 원효다. 아명은 서당, 신당이다. 압량(지금의 경산군) 불지촌 출신이며 잉피공의 손자이며 내마 남달의 아들이다. 648년 진덕여왕 2년에 황룡사에서 스님이 되어 불전을 섭렵하며 수행을 했다. 650년에 의상과 현장이 인도에서 새로 들여온 신유식(新唯識)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가려고 요동까지 갔다가 첩자로 몰려 채포되어 갇혀있다가 돌아왔다. 

 

 

 

661년에 다시 의상과 함께 해로를 통해 당나라로 가려고 배를 타고 당향성으로 가던 도중에 밤에 오래된  무덤에서 잠을 자다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며 모든 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는 자각을 하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찾이야 한다며 되돌아 왔다.

 

 

 

660년에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은 후에는 자신을 소성거사, 복성거사라 하고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본 따 무애박을 만들어 천촌만락을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화엄경에 나오는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넘어 설 수 있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는 이치를 담은 노래 가락을 지어 무애가(無碍歌)라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본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정토를 이룰 수 있으며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원효는 주로 분황사 등에 머물면서 불경의 연구와 화엄경소 등의 저술에 힘쓰기도 했다. 만년에는 경주의  고선사에 머물다가 686년 신문왕 6년 3월 30일 혈사에서 70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그가 죽은 후에 아들인 설총이 유골을 빻아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다고 전해진다. 신라 애장왕 때 그의 후손인 설중업이 당시 실권자였던 각간 김언승(뒷날 헌덕왕)의 후원으로 고선사에 서당화상비를 세웠다. 이 비석은 오늘날에도 일부 훼손되어 전해진다. 고려 명종 때도 화쟁국사빈를 세웠다고하나 흔적은 없다.

 

 

 

원효는 일심사상과 무애사상, 화쟁사상 등을 정립해 민중을 교화시키는 스님으로 당시에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대중화 시키는데 공헌했다. 그의 저술은 '금감반야경소' 3권, '금강삼매경론' 3권, '화엄경종요', '유마경소' 3권, '해심밀경소' 3권, '법망경소' 2권 등  9부 240권에 달한다. 양과 질에 있어서 추종을 불허하는 저술이다. 당나라 석학들은 그의 저술을 '해동소(海東宵)' 라 칭송했다. 원효 사상의 핵심은 '일심(一心)과 화쟁(和諍)'이다. "도는 모든 존재에 미치지만 결국은 하나의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간다" 라고 주장하며 만물을 차별없이 사랑하는 삶을 강조했다.

 

 

 

종파들의 파쟁을 통합하기 위해 화쟁사상, 원흉회통사상을 내세웠다. 일심은 원효사상의 바탕이며 인간은 누구나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마음의 근원을 회복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 마음의 근원이  바로 일심이며 일심은 모든 법, 즉 모든 존재와 현상의 근거이며 일심이 구현된 세계가 바로 정토(淨土)라고 한다. 일심은 평등하며 무차별하며 일심에서 보면 진여와 생멸이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했다. 화쟁은 다양한 불교 이론들 사이의 다툼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쟁론은 집착 때문이며 마음의 근원을 향하면  쟁론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일심과 화쟁을 강조한 원효사상은 중국 불교의 쟁점인  중관론(中觀論)과 유식론(唯識論)의 대립을 독창적으로 종합하는 의미가 있다. 발생과 소멸이 없는 진여와 현상적인 생멸이 모두 일심의 두가지 측면에 불과하며 이것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인 본성적으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청정한 마음을 강조하는 유식론과의 대립을 극복하려 했다. 

 

 

 

신라시대 천재적인 불교의 고승인 원효가 남긴 진리 탐구의 업적은 경이롭다. 중국의 법장과 장관 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불교의 일체유심조 사상의 근원이며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지녔다는 사상의 근원이 원효에서 강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에 70세를 살면서 후세에 남긴 교훈이 영원 후세인의 심금을 타고 흐르고 있다. 원효가 수행했다는 분황사를 다시 찾아 가봐야 겠다.

 

- 이동한 헌정회(憲政會) 편집주간,

- 현, 전국안전신문 논설위원,

- ♦이동한 DM(dream making)리더십포럼이사장, 전 세계일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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